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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파 방정환 ] 어린이날 제대로 알기

by 킴샤인 2020.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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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정환 선생님 이전의 어린이는 늙은이와 젊은이 사이의 이도 저도 아닌 약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죠. 하지만 '어린이'라는 단어 사용과 '어린이날'을 제정함으로써 어린이에 대한 인식 개선이 시작되었습니다. 

 

방정환의 어린이날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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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에게]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세요.
어린이를 가까이하시고 자주 이야기해 주세요.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고 늘 부드럽게 대해 주세요.
이발, 목욕, 의복을 충분하게 제공해 주세요.
산보와 원족( 나들이)을 가끔 시켜주세요.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하게 타일러 주세요.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만한 놀이터와 기계를 만들어 주세요.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와 젊은이에게 있는 것이 아닌 어린이에게만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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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에게]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어른들에게는 물론, 어린이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뒷간이나 담벼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등을 그리지 말기로 합시다.
꽃이나 풀을 꺽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로 합시다.

 

 어린이날 선언문은 어른과 어린이, 서로를 대할 때, 의무와 지침을 알려줍니다. 쌍방이 협력해야 상호 간 진정한 배려가 나온다는 뜻깊은 마음이 잘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어린이를 사랑하셨던 방정환 선생님은 어떤 성장과정을 겪었을까요? 이어서 알아보겠습니다.


소파 방정환 (  小波  方定煥)

소파는 작은 물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생 1899년 11월 9일

        사망 1931년 7월 23일 (33살)

 


 

서울 종로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나다.

 방정환은 서울 야주개( 현 당주동, 광화문 역 )에서 어물전과 마곡상을 경영하던 방한용 상인의 장남입니다. 부유한 가문이었죠. 방정환은 천자문은 물론, 책에 관심이 많고 리더십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부친 사업 쇠퇴로 인한
불우한 어린 시절.

 1907년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으로 국내 정세가 불안정해졌고, 가게가 한순간에 몰락합니다. 이로 인해 방정환은 앞서 부유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냅니다. 하지만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방정환의 총명함과 리더십은 드러났습니다. 어느 처음 본 미술가가 방정환에게 환등기를 선물한 일은 방정환의 사교성과 외향적인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환등기’

 놀거리가 없었던 가난한 소년에게 환등기는 최고의 장난감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환등기를 이용해서, 무성 영화 해설자 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환등기를 가지고 놀며, 연극과 사진 제작에 흥미를 가졌고, 훗날 강단에서 아이들에게 구연동화를 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죠.

 

부친의 권유로
천도교인이 되다.

 방정환의 업적 대부분은 천도교적 종교 활동입니다. 처음부터 천도교였던 것은 아닙니다. 방정환의 아버지가 사업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천도교인이 되었고, 방정환도 아버지를 따라 천도교인이 되었습니다.

 천도교에 들어가서는 어린이 토론 연설 모임 ‘소년입지회’ 활동을 했습니다. 주로 동화 구연과 토론회를 했죠. 소년 입지회에 가입할 당시 8 ~ 9 명의 소규모 조직이었으나, 1910년 (활동 2년 차) 방정환이 소년입지회의 총대장 할 때는, 회원수 160명인 단체가 되었습니다. 대 운동회 개최, 대한문에서의 경축 행사, 장충단으로 소풍, 성북동에서 밤 줍기 등 수많은 활동을 방정환의 주도 하에 전개합니다.


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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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보성소학교

1909년 매동보통학교

1910년 (사업실패로 인해 광화문에서 을지로 5가로 이사 및 전학) 미동보통학교

1913년 선린상업학교 입학 ( 자퇴 )

?      보성전문학원 법과

 

 방정환은 뛰어난 리더십과 총명한 머리를 지녔다고 하지만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인해 보통학교 졸업 후, 선린 상업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경제적인 이유였죠. 그러나 몇 년 뒤, 보성전문학원 법과를 다닙니다. 전문 학원은 지금으로 말하면 대학교입니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현 선린 인터넷 고등학교, 용산구 원효로. 사진 출처 나무 위키

 

선린 상업 고등학교 중퇴 후,
사자생의 삶.

 학술적인 탐구가 맞았던 방정환에게 상고에서 배우는 기술적인 건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일자리 제의도 무시한 채, 1년을 남기고 선린 상업 고등학교를 중퇴합니다.

 중퇴 후에는 곧바로 토지 조사국의 서류 필사 사자생으로 입사합니다. 하루에 20전, 한 달에 5원을 벌었습니다. 한 달에 5원은 당시로 박봉입니다. 중졸 학력을 가지고 돈을 많이 받기는 힘들었죠. 그래도 이 돈을 집안에 보태며, 생계를 이어갑니다.

 

중매로
손병희의 사위가 되다.

 계속 불우한 생활을 이어가던 중, 1917년. 방정환을 눈여겨보던 지인이 중매를 해줍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결혼합니다. 상대방은 손용희. 손용희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의암 손병희로서, 천도 교주였습니다. 방정환은 이를 계기로 경제적인 여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손병희의 사위라는 사회적 관심과 더불어 사자생에서 벗어나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전문학원의 법과에 진학합니다.

 

경성청년구락부

 경성청년구락부에서는 연극을 통해 청년의 진취 의식을 고취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그리고 여기서 첫 자작 소인극 <동원령>의 주연 및 연출합니다. 이는 방정환이 후에 다양한 동화를 쓰고 구연동화를 하는데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신청년'

 1919년. 청년 문화 운동을 담은 <신청년> 잡지를 발간합니다. 또한 1919.3.1 범 국민적인 운동의 성공적인 실행을 위해 <독립신문>을 발행합니다. 만세 운동에 직접적인 참여는 하지 않고, 어른들의 만세 운동이 원활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만을 합니다.

 1920년. 방정환의 경성청년구락부에서 영화를 제작한 경험과 잡지를 발간하며 전파한 사상에 대한 소문이 퍼집니다. 이로 인해 민족정신의 고취에 대한 강연과 구연동화를 하러 전국 각지로 다닙니다. 방정환이 온다는 소문이 들리면 강연장은 인파로 인해 인산인해였습니다.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개벽'

 20년에 방정환이 간행한 <개벽>잡지에서 '어린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당시에는 '늙은이'와 '젊은이'로만 구분되어있었던 사회적 인식 속에서 어린아이의 인권을 신장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영향을 바탕으로 했기에 동화 구연과 자아 성찰에 관한 강연이 인기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23년. 어린이를 위한 잡지 <어린이>를 발행합니다. 초기에는 비공식적으로 기획 및 제작을 했지만 25년부터 죽기 직전인 31년 2월까지 <어린이>의 제작과 발행에 직접 관여합니다. 그리고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여 '어린이날'을 제정합니다.

 

젊은 나이,
죽음

 1931년. 민족의식 향상을 위해 계속된 잡지 발행과 민족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7월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는 무리한 활동으로 인한 과로사로 보입니다.

 


 

 방정환 선생님은 가난한 유년시절을 지내며, 어린 시절의 소중함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본인에게 닥친 위기 속에서도 긍정적이고 슬기롭게 풀어가는 지혜. 사람 한 명이 잡지 1개, 혹은 동호회 1개 만들기도 힘든데, 일제의 억압 속에서 우리 민족의 인권신장을 위한 잡지와 조직을 여러 개 만든 걸 보며. 굉장히 부지런하고, 열정 넘치는 위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한다'

 방정환 선생님의 유언입니다. 어린이. 세대가 지속되기 위해 어린이에 대한 보호와 교육은 중요하죠. 일찍이부터 깨어있는 시각으로 민족을 이끈 방정환 선생님. 방정환 선생님에게 부탁받은 마지막 말의 무게를 나눠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무엇일까요?

다가오는 어린이 날, 방정환 선생님을 생각하며 매 순간 발전하는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공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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